혹시 아이의 여권을 보며 달력을 넘기는 밤이 있으신가요? 특히 아들을 둔 부모님이라면 '복수국적'과 '병역'이라는 두 단어 사이에서 머릿속이 복잡해질 수 있습니다. 저도 미국에 사는 지인이 아들 문제로 밤낮없이 영사관 홈페이지를 뒤지던 모습을 곁에서 지켜봤기에 그 무게를 조금이나마 짐작합니다.
'국적이탈'은 단순히 서류 한 장을 제출하는 행정 절차가 아닙니다. 아이의 미래와 정체성, 그리고 현실적인 의무가 걸린 중대한 '결정'입니다.
오늘은 법무법인의 딱딱한 설명 대신, 이 과정을 먼저 겪어본 입장에서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와 놓치기 쉬운 함정들을 짚어보겠습니다.
국적이탈, '선택' 그리고 '상실'과 뭐가 다른가요?
이 세 가지를 혼동하는 순간, 모든 계획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국적이탈: '선천적'으로 한국 국적과 외국 국적을 모두 가진 사람(선천적 복수국적자)이 외국 국적을 선택하겠다는 의미로 한국 국적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주제)
국적선택: 반대로 복수국적자가 한국 국적을 선택하겠다고 신고하는 것입니다. (남성은 병역 의무를 이행해야만 가능)
국적상실: 한국인이었던 사람이 '후천적'으로 미국 시민권 등을 취득해 외국인이 되었을 때, 한국 국적이 '사라졌음'을 신고하는 것입니다.
제 지인 중 한 분은 본인이 미국 시민권을 따고 '국적상실' 신고를 했던 경험만 생각하고, 미국에서 태어난 아들도 나중에 해도 되는 줄 알았다가 큰 낭패를 볼 뻔했습니다. 이 둘은 대상과 절차, 그리고 '기한'이 완전히 다릅니다.
남자아이 부모가 '18세 3월 31일'에 목숨 거는 이유
이 글의 핵심입니다. 대한민국 국적법과 병역법은 '선천적 복수국적자' 남성에게 매우 엄격한 족쇄를 채웁니다.
바로 "만 18세가 되는 해의 3월 31일까지" 국적이탈 신고를 마쳐야만 병역 의무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날짜를 단 하루라도 넘기면, 국적이탈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집니다. 그럼 어떻게 되냐고요?
병역의무가 해소되는 만 36세가 될 때까지 한국 국적을 버릴 수 없습니다.
그사이 한국에 입국하거나 경제 활동을 할 경우, 병역의무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사실상 '한국인'으로 묶여버리는 셈입니다.
개인적인 견해: 이 법은 사실 '검은 머리 외국인'의 병역 기피나 '원정출산'을 막기 위한 취지입니다. 하지만 억울한 사례도 분명히 발생합니다. 부모가 이민 1.5세라 한국법을 잘 몰랐거나, 아이가 태어난 뒤 한 번도 한국에 오지 않아 정체성 자체가 외국인인 경우에도 예외는 없습니다.
"설마 했던" 지인의 아들, 한국에서 발목 잡힌 실화
이건 실제로 제 지인의 지인에게 벌어진 일입니다.
캐나다에서 태어나고 자란 A군. 부모님은 A군이 18세가 되던 해에 이 사실을 뒤늦게 알았지만, '캐나다 사람인데 설마 무슨 일 있겠어'라며 신고 기간(3/31)을 넘겼습니다.
문제가 터진 건 A군이 21살이 되던 해, 한국의 대학으로 교환학생을 오면서였습니다. 6개월 과정을 마치고 캐나다로 돌아가려는데 공항에서 출국금지 조치를 당했습니다. '병역의무자'로 등록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A군은 그해 군대에 입대해야 했습니다. 캐나다에서의 학업과 모든 계획이 중단된 것은 물론입니다. 이는 '남의 일'이 아닙니다.
정말 아찔한 순간이죠. 혹시 주변에서 이런 사례를 보셨거나, '우리 아이는 괜찮겠지' 안일하게 생각하고 계시진 않나요?
잠깐, 여기서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이쯤 되면 "여자아이는 그럼 괜찮은가?"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네, 여성은 병역 의무가 없으므로 훨씬 여유롭습니다. 만 22세가 되기 전까지 한국 국적을 선택할지 말지 결정하면 되고, 그 이후에도 사실상 불이익이 적습니다.
그럼 당장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요? (신고 장소와 서류)
국적이탈 신고는 한국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외국에 주소가 있는 상태'**에서 **'거주지 관할 재외공관(대사관, 영사관)'**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필요한 서류는 영사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핵심은 이것입니다.
국적이탈신고서 (양식)
유효한 외국 여권 (원본 및 사본)
복수국적자임을 증명하는 서류 (출생증명서 등)
[중요] 본인과 부모의 '상세' 기본증명서 및 가족관계증명서 (최근 3개월 내 발급)
외국에 거주 중임을 증명하는 서류 (영주권, 비자 등)
(남성의 경우) 병역 관련 서류 (병적증명서 또는 그에 준하는 서류)
서류 준비 과정이 정말 만만치 않죠.
반드시 피해야 할 오해
오해 1: "원정출산도 다 봐준다?"
절대 아닙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외국 국적을 주기 위해 '일시적으로' 외국에 체류하며 출산한 경우, 즉 '원정출산'으로 판명되면 국적이탈 신고 자체가 반려될 수 있습니다. 판단 기준(부모의 영주권 여부, 거주 기간 등)이 매우 까다롭습니다.
오해 2: "18세가 넘어도 군대만 다녀오면 이탈할 수 있다?"
아닙니다. 18세 3월 31일이 지나면 '이탈'의 기회는 사라집니다. 군 복무를 마치면 '국적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복무 후 2년 내)가 생기거나, 혹은 '외국 국적 불행사 서약'을 하고 복수국적을 유지할 수는 있지만, '이탈(포기)'과는 다릅니다.
내 상황에 맞는 체크리스트
만 17세 이하 남자아이 부모: 지금 당장 아이의 생년월일을 확인하고, 18세가 되는 해의 3월 31일이 언제인지 달력에 표시하세요. 늦어도 6개월 전부터 서류 준비를 시작해야 합니다.
만 17세 이하 여자아이 부모: 상대적으로 여유롭지만, 아이가 만 22세가 되기 전에는 진로(한국 활동 여부)에 따라 국적 문제를 정리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18세 3월 31일이 지난 남성: 안타깝지만, 법적으로는 병역 의무를 이행하거나 만 36세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전문 변호사와 상담이 필요하지만, 법을 되돌리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시민권을 딴 이민 1세대 (부모): 당신의 케이스는 '국적이탈'이 아니라 '국적상실'입니다. 지금이라도 영사관에 '국적상실' 신고를 하셔야 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1. 아이가 한국에 출생신고가 안 되어 있으면 괜찮지 않나요?
A. 절대 아닙니다! 부모 중 한 명이라도 한국 국적자라면, 아이는 태어남과 동시에 (출생신고 여부와 상관없이) 선천적 복수국적자입니다. 오히려 출생신고가 안 되어 있으면 국적이탈 서류 준비(가족관계증명서 발급 등)가 더 복잡해집니다.
Q2. 18세 3월 30일에 영사관에 서류 내면 바로 처리되나요?
A. 위험합니다! 신고(접수)일 기준이긴 하지만, 서류 미비로 반려되면 끝입니다. 법무부 처리 기간(최대 6개월 이상)도 있으므로, 최소 몇 개월의 여유를 두고 신청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Q3. 부모가 이혼했거나 사이가 안 좋으면 어떡하죠?
A. 국적이탈 신고 시 부모 양측의 서류가 필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한쪽 부모의 협조가 어렵다면, 이 또한 법률 상담을 통해 미리 대비해야 합니다.
마치며: 단순한 포기가 아닌, 미래를 위한 선택
국적이탈은 '한국을 버린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아이가 태어나고 자란 삶의 터전에서 불필요한 법적 제약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부모의 마지막 '책임'일 수 있습니다.
그 책임의 첫걸음은 '정확한 정보'와 '엄격한 시간 엄수'입니다.
오늘 나눈 이야기들이 시한폭탄처럼 느껴지는 국적 문제로 고민하는 분들께 실질적인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